
1. 음악이 내게 다가오다
음악이라는 존재가 내 안에 처음 들어온 건 8살 무렵, 어느 피아노 학원이었을 것이다.
당시 유행하던 교육이었고 나 역시 싫지 않았다. 13살까지 건반을 눌렀지만 딱히 열심히 하진 않았다. 다만, 나는 건반을 누르는 행위 자체를 좋아했다.
특히 피아노의 저음부는 건반이 유독 무겁다. 그리고 그 소리는 강렬하다.
소리가 귀로만 들리는 것이 아니라, 몸 안으로 진동한다. 그 느낌이 좋았다.
12살에 처음으로 삼성 마이마이를 갖게되었다.
아마 이때부터가 본격적으로 음악을 듣게 된 계기가 된 것 같다.
한 번은 학교 음악시간에 클래식 수업을 받게 되었다.
G선상의아리아와 신세계교향곡이었다.
익숙했던 곡을 수업에서 만나게 되니 반가웠다. '이런게 클래식인가? 다들 어디선가 들어본 곡들이네?' 라는 생각에 관심이 생겨서, G선상의아리아가 있는 클래식 테이프를 하나 샀다.
그 테이프의 첫곡은 G선상의 아리아가 아닌 '지고이네르바이젠'이었고,
그날 나는 그 곡을 듣고는 묘한 감정에 빠지게 되었다.
그렇게, 음악은 내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2. 내가 음악으로 들어가다
비록 피아노연주는 이제 스트레스 해소용 혹은 간간히 연주해보는 취미생활이 되었지만,
중/고등학교 시절의 나는 전반적으로 음악에 대해 더 많이 알게되는 시기였다.
이 시기의 가장 큰 변화는 장르의 추가였다.
중학시절 과외선생님으로 부터 알게된 본조비, 메탈리카, 엑스제팬이 그렇다. 특히 엑스제팬의 세계는 나에게 여러모로 치명적이었다. 과외선생님이 건내준 총 4개의 테이프는 나에게 다음 세계로 향하는 문이 되었다.
그들의 Jealousy 앨범 첫곡인 Es Durのピアノ線 이라는 곡을 처음 듣자마자,
지고이네르바이젠을 처음 들었던 바로 그 감정이 튀어나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테이프에 녹음된 음악은 더 선명하고 맑게 들리는 것 같았다. 추소문 결과 그 테이프가 일본 회사의 특별한 방식으로 제작된 테이프였다는걸 알게 되었다.
(*TDK Type II High Position/Chrome)
지금 생각해보면, 이때 나는 단조(Minor Key), 음질, 음압 그리고 구조 라는걸 몸으로 익히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해외라는 곳이 실제의 나와 연결될 수도 있는 곳이구나 라는 감각이 생겼다.
처음 알게된 감정과 정보에, 나는 좀 더 공격적으로 파고들었다.
이와 비슷한 수준의 음악이 더 있는지,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음질을 구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찾아냈다. 용산과 남대문지하상가를 수시로 다니고, 후기에는 PC통신으로는 부족해 넷스케이프를 켜서 직접 인터넷 문서를 찾아보곤 했다.
그땐 그게 공부인지도 몰랐다. 나는 듣고 있었고, 동시에 배워지고 있었다.
이렇게 그 무렵의 나는 정보를 찾는 방식도, 음악을 담는 방식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3. 음악과 나
어느 순간 사람들의 음악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있었다.
스트리밍의 시대가 열렸고, 사람들은 쉽고 빠른 방식으로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음악이 소유에서 경험으로 바뀌는 시기임에도, 소유라는 고집을 버리지 않았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 더욱더 장르를 넓혀갔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한국 대중음악을 듣기도 했고 팝, 메탈, 락, 뉴에이지, 힙합 등 거의 모든구간의 음악을 듣곤했다.
그리고 이때 나는 음악취향이 다른 사람들과 좀 다르다는걸 느끼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던 락과 메탈 장르의 플레이리스트 이름은 '미친음악' 이었다.
이 이름은 내가 원하던 이름이 아니다.
나는 '미친음악' 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는 한편 나에게는, 아주 새로운 장르의 음악을 발견하게 되는 계기가 생겼다.
비장미 넘치는 단조 음악
클래식과 XJAPAN으로부터 이어져오던 오케스트라
락+메탈의 귀를 꽉 채워주던 밀도감 높은 음악
내가 갖고 있던 언어는 '웅장한 음악' 이라는 단순한 단어였지만, 마침내 발견했다.
트레일러뮤직 이란것을. 후에 이는 에픽뮤직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시기에 나는 Two Steps From the Hell 등의 에픽뮤직 제작자들을 알게되었다.
그리고 이 이름을 알게 된 뒤로, 음악은 다시 달라지기 시작했다.
4. 음악과 함께 존재하다
나는 결국 내 취향을 인정하기로 했다.
Youtube가 대중화되며 소수의 사람들이었지만 나같은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는걸 알게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게임산업이 발달하게 되면서, 게임 OST들도 상당한 수준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영화나 TV프로그램 등에서도 취향에 맞는 음악이 있으면 찾아듣곤 했는데, 게임OST는 마치 선물상자같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왜 이런 종류의 음악들을 좋아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너무 무겁거나, 압력이 강해서 지속적으로 듣기 힘든곡이란 것을 나 자신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사람들과 대화를 해보아도, 비슷한 곡을 좋아하는 Youtube의 댓글들을 봐도 이유를 찾기 힘들었다. 가끔 비슷한 감정이 드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내 느낌과 미묘하게 달랐다.
비장하거나 슬픈 음악을 듣는다고 슬퍼지지 않았다.
에픽 음악을 듣는다고 영웅이 되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게임 OST를 듣는다고 게임을 하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신나는 음악을 듣는다고 즐거워지지도 않았다.
어느날 이 의문은 언어모델과의 대화를 통해 처음으로 정리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AI들도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이야기를 해서, 나는 다양한 방면으로 질문을 시도했다. 그리고 어느정도 정리가 되어 이 글을 남긴다.
조금 난해한 표현이지만, 내가 가장 나의 생각과 비슷하다고 느낀점은 이것이다.
음악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이라는 정교한 세상으로 들어간다.
그 안에서 거대한 구조가 주는 압박감을 견디며,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선율의 경외를 확인한다. 그것은 세상의 무게를 이겨낼 에너지를 공급받는 일이다.
내가 경외하던 구조가
철저히 계산된 작곡과 수많은 레이어의 결과물이라는 걸 알았을 때는 조금 실망했지만,
그래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이제서야 나를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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